- 순례자의 길, 그 발자취를 따라서
글 | 김선영(65기 OTC훈련생)
지난 4월, 유난히 따스한 어느 아침 우리 65기 OTC 훈련생들은 순례자의 길, 그 발자취를 따라 1박 2일 일정으로 여행을 떠났다. 예수처럼 살다간 믿음의 족적을 경험하고, 경남지역 어머니 교회에서는 일사 각오의 신앙을 만났다. 일찍이 남의 땅으로 달려와 복음을 전하며 순직했던 선배의 열정까지 마주했다.
예수처럼 살다간 사람, 손양원
여행길의 처음은 경남 함안에 조용한 시골마을, 손양원 목사의 어린 시절이 깃든 생가터에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손양원 기념관. 그곳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하나님 사랑, 사람 사랑, 나라 사랑’이라는 그의 삶을 대표하는 세 가지 비전문이 우리를 맞이한다. 그가 걸어간 모든 여정의 이유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던 사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사람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했던 사람, 손양원. 신사참배반대운동의 선두자였던 애국지사로, 평생 한센인의 친구로 살았던 그. 나환자들의 상처 난 피고름을 입으로 빨아 빼주었다는 이야기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이 나오게 하셨으니 감사합니다.” 두 아들을 잃고 눈물로 썼던 아홉 가지 감사기도문. 잔디밭 사이로 묵묵히 길을 이뤄내는 기도문을 따라 걷는 걸음걸음 가슴이 묵직해졌다. 비록 코로나19로 인하여 내부관람을 할 수는 없었지만, 되려 그것이 순례자의 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계획할지라도 그 길을 인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이 발길을 되돌리는 가르침 또한 있으리라 믿으며 발길을 돌렸다.
경남 어머니교회 마산문창교회 & 주기철 목사
두 번째로 찾은 곳은 마산지역에 처음으로 생겼다 하여 ‘경남 어머니교회’라고도 불리는 마산문창교회였다.
손양원 목사와 함께 고신교단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꼽히는 주기철 목사가 담임하였던 곳으로, 교회 한 층 전체가 교회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역사관으로 전시되어 있으며, 주기철 목사를 기리는 기념관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120년 전 처음으로 이 땅을 찾아왔던, 이제는 낡을 대로 낡아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선교사의 여행 가방부터, 성도들의 새벽을 깨웠던 지금은 빛바랜 종, 시간의 흔적이 쌓이고 쌓여 바래고 퇴색되어 글씨조차 보이지는 않는 서적이며 그 시절 주보와 성경까지. 복음의 불모지와 같았던 이곳에 한 교회가 세워지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흘렸던 땀과 눈물과 기도와 열정이 그곳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예수를 따라서, 남을 위하여, 부활의 진리를 위하여’ 무학산 십자 바위에 올라 밤이슬을 맞으며 밤새워 눈물의 기도를 드렸던 주기철 목사의 일사 각오의 가르침은 교회가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는 지금의 시대에 얼마나 간절한가.
손양원 목사와 함께 고신교단의 대표적인 지도자로 꼽히는 주기철 목사가 담임하였던 곳으로, 교회 한 층 전체가 교회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역사관으로 전시되어 있으며, 주기철 목사를 기리는 기념관도 함께 자리하고 있다.
120년 전 처음으로 이 땅을 찾아왔던, 이제는 낡을 대로 낡아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선교사의 여행 가방부터, 성도들의 새벽을 깨웠던 지금은 빛바랜 종, 시간의 흔적이 쌓이고 쌓여 바래고 퇴색되어 글씨조차 보이지는 않는 서적이며 그 시절 주보와 성경까지. 복음의 불모지와 같았던 이곳에 한 교회가 세워지기까지, 수많은 사람이 흘렸던 땀과 눈물과 기도와 열정이 그곳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예수를 따라서, 남을 위하여, 부활의 진리를 위하여’ 무학산 십자 바위에 올라 밤이슬을 맞으며 밤새워 눈물의 기도를 드렸던 주기철 목사의 일사 각오의 가르침은 교회가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는 지금의 시대에 얼마나 간절한가.
한국교회의 치욕의 시대, 변절의 시대 때에, 1944년 47세의 나이로 순교할 때까지 13년간 신사참배 강요에 맞서 싸우며 온갖 고문과 심문을 받았던 주기철 목사. 평양 산정현교회의 목사직을 파면당하고 교회와 사택이 폐쇄되고, 온 가족과 살림살이가 길가에 내쳐지는 속에서도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그. 평양 형무소의 차가운 바닥에서 아내와의 마지막 면회 때 ‘따스한 숭늉 한 사발’을 그리워했다던 그의 마지막 일화는 우리의 마음을 더 뜨겁게 한다. 고문받아 쇠약해진 몸을 가눌 수조차 없어 간수의 몸에 실려나와 속을 덥혀줄 따스한 숭늉 한 사발을 그리워했던 그. ‘죽어서도 조선교회를 위해 기도하리라’ 유언을 남길 만큼 강인하였지만, 그 역시 때로는 외롭고, 힘들고, 연약했던 사람이었을 면모는 되려 우리에게 말해준다. 그 ‘부활 진리’로 인하여 나같이 연약한 죄인도 이 십자가의 길 위에 설 수 있다고….
순직호주선교사묘원 &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
낮은 햇살이 길게 드리워지는 오후, 순교자의 붉은 피와 뜨거웠던 신앙을 노래하듯 길목마다 붉게 피어난 홍가시나무 길을 따라 선교사묘원을 찾았다. 창원공원묘원의 가장 양지바른 곳에 세워진 여덟 명의 호주선교사의 순직기념비와 경남선교 120주년 기념관. 1889년 호주선교사 데이비스가 처음으로 경남 땅을 밟은 것을 시작으로, 해방 후까지 모두 127명의 선교사가 경남 땅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육과 의료봉사에 헌신하였다고…. 초가집 세 채에서 시작된 고아원에서 최초의 간호사가 나오고, 교수가 나오는, 불모지였던 땅에 교육의 씨앗을 뿌림으로 한국의 지도자들을 키워내었다. 그리하여 120년이 지난 오늘 33만4천 명의 기독교인 열매를 맺었으니, 한 알의 밀알에서 시작된 복음의 능력이요, 십자가의 능력이리라.
1890년, 33살 파란눈의 젊은 청년의 순교의 피가 뿌려진 곳. 1936년 일제강점기 암흑의 시대, 신사참배반대운동의 씨앗이 되었던 곳. 주기철, 손양원 목사를 비롯하여 혹독한 탄압 속에서도 애국 운동의 선두가 되었던 곳. 6.25한국전쟁의 마지막 방어선이 되어, 최후의 혈전을 치르며 수복의 발판이 되었던 곳. 수많은 신앙 선배들의 기도 무릎이 쌓이고, 눈물이 뿌려지고, 목숨이 심긴 곳. 그곳에 이제 우리가 있다. 120년 전, 이 땅을 밟았던 선교사들의 순교의 피부터 오늘 우리가 부름을 받은 사명을 마치고 이곳에 다시 심어지기까지. 순교의 뜨거운 역사의 흐름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곳….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출처 : 고신뉴스 KNC
http://www.kosi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1036